제목"모세내전" 책서문2021-12-15 09:29
작성자 Level 10

서문

2020년 모든 것이 멈추었다. 학교, 회사, 나라도 닫히고 막히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가 터진 것도 미사일이 날아온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온 세상 모든 것이 멈추어 섰다. 하늘, 땅, 바다마저 차단되고 봉쇄되고 말았다.

태풍, 토네이도, 쓰나미, 허리케인이 덮치고 할퀴고 간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이 땅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 공평한 멈춤의 시간이다.

온 세상 모든 것이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멀쩡하게 그대로 서 있는데도

언제까지라는 사인도 없이 모두 혼란과 위기 속에 멈추어 선 것이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신학과 철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최고의 사상가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절망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절망을 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을 부르는 것이다.

절망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독제는 믿음이다. 가장 훌륭한 치료제는 희망이다.”

그는 지독한 콤플렉스와 우울증으로 평생 시달려 왔는데, 그것은 중증 척추장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은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지적한다.

 

이때 우리 교회는 절망 속에서 "내 백성을 보내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단에서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광기 서린 세상 세력인 바로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지난 6개월 동안 말씀을 증언했다. 믿음으로 극복하며 은혜로 절망을 이겨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증언한 말씀들을 다시 책으로 출판한다.

세상에 책을 내미는 자의 책임도 없이 설교자의 민낯을 보이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복음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욕심을 드러낸다.

'다시 또’ 라는 단어가 이번에도 자꾸만 거슬린다.

기쁨보다 부담이 되는 것 같고 축복보다는 짐이 되는 것 같아서이다. '이 시대에 누가 이런 책을 읽는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가 1년이 지나가고 있다. 하루가 참 짧다 생각하다가도 돌이켜 보면 꽤 길다.

해 뜨고 해 지는 일이 어디 만만한 순례길인가. 어느 시인의 글처럼, 차가운 땅에서도 꽃잎을 피어내기 위해 밤새도록 얼마나 용을 쓰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조각도 저편으로 가려고 얼마나 발이 부르렀을 텐데...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목회 3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고만 할 것인가?

 

미국 할리우드의 살아 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한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황야의 무법자〉에서 〈더티 해리〉까지 그리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그렌 토리노)까지

배우로, 감독으로, 연출가로, 작곡가로 지난 70년의 삶을 성공적으로 담고 있다.

90세가 된 그에게는 세월의 무게를 비껴낼 수 없는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 앉아 있지만 바위 같은 묵직함이 그 주름마다 숨어 있어

인생을 함부로 살아오지 않은 강직함과 활처럼 굽어버린 등이지만 세월 속에 단련된 무시할 수 없는 엄숙한 궤적이 느껴진다.

무대라는 프레임 속에서 과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모두 거부하고 최소한의 것들만 남겨둔 그의 표정 속에는

악에 대한 분노와 약자에 대한 배려가 탁자 위의 사막처럼 평온하지만 그의 걸음은 마법처럼 하나씩 문제를 풀어나간다.

잔뜩 눈살을 찌푸린 그의 인상은 의미 없이 거들먹거리는 오만한 눈빛이 아니다.

할리우드의 질척거리는 느끼한 눈빛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눈빛은 지금도 살아 있다. 진정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총구에서 나오는 악에 대한 통쾌한 복수에서 쾌감을 느끼는 순간, 어느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가히 기가 막힐 정도로 인상적이다.

황금도 찬사도 무심하게 말이다. “덤벼 봐.” 악당들에게 내뱉는 그의 말이 공명되어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의 굽은 등과 뒷모습이 허전하지도 쓸쓸하지 않게 의미 있게 성큼 다가온다.

누군가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늙어 가고 싶다”라고 했던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는 영화라는 틀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 있기에

그의 뒷모습은 적막한 스크린을 오랫동안 채우면서 고요한 울림을 갖게 한다.

 

모세가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은 훨씬 더 인상적이며 감동적이다.

120년 그의 인생은 심장이 멈출 듯 다시 시작하는 아찔할 정도로 극적인 한 편의 드라마다.

모세, 그는 하나의 무대 위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듯 거침없이 악과 싸우며 불꽃처럼 살아낸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는 무대 아래 백성들의 아픔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달려가서 단숨에 그들을 끌어안고 함께 울어주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손을 내밀면 바다가 갈라지고 지팡이를 치면 바위에서 생수를 솟아나게 한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 눈앞에서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곳을 밟지도 못한 채 떠나간 그의 뒷모습은 초라함도 쓸쓸함도 아닌

엄숙하고 거룩하게 다가온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실루엣마저 비추어 주고 있기에 그렇다.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으로 꾸밀 수도 없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흔적이다.

물론 뒷모습은 남은 자의 몫이며 남아 있는 자들의 책임이다. 왠지 요즈음 뒷모습에 관심이 많다. 마음이 헛헛해지는 탓이다.

톨스토이의 단편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었다. 죽음의 주제가 무겁지만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용서를 마음에 품으면서 죽음에서 비로소 해방되고 그 순간 한줄기 빛이 내려온다. 그 순간 “빛이다!”라고 소리친다.

이 땅이 끝이 아님을 증언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마지막 자막이 올라간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수고하신 모든 분들의 이름이지만 그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 있다면 그 속에서 이름을 찾아낼 것이다. 지난 목회 33년 동안 곁에 있어준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먼저 강단에서 정제되지 않은 경직된 언어로 인해 본의와는 다르게 상처받은 분들에게 깊이 사과드리고 싶고,

말씀에 충실을 앞세워 절제하지 못한 긴 호흡 끝에 한숨을 토하면서도 실망을 감추고 기다려 주신 분들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음폭의 고저에 놀라면서도 어느덧 익숙해진 분들, 볼륨이라도 낮아지면 오히려 어디 몸이 불편하느냐고 걱정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아프게 남아 있다.

물론 또 한 권의 책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주신 많은 분들의 격려와 사랑을 한마디도 잊지 않고 가슴 깊이 품고 있다.

예배를 마친 후 돌아가시는 길에 다시 돌아보면서 응원의 눈길을 주시고 멈추어 사랑의 손길을 잡아주시는 분들 모두

주님 앞에 가서도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이다. 교회를 위해서 오랫동안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목사의 건강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을 향한 긴장과 감동이 은혜와 기쁨으로 남아 있다.

지난 여름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 병원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집사님께서 찾아오셔서

보너스로 받은 것을 그대로 사무실에 놓고 가셨는데 그때 책 출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전화를 통해 다시 들려준 말씀은 “목사님 것이니까 목사님 알아서 사용하세요”였다.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필요한 곳이 많이 있고 소중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도... 그 이름 앞에 한참이나 먹먹한 마음이었다.

 

2020년 11월이다. 여전히 손을 씻고 있다. 노래를 부르며 기도를 하면서... 그런데 이제는 손금이 희미할 정도로 씻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릴 만큼이나... 그것은 지난날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고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스크로 입과 코를 막고 있다.

함부로 뱉어낸 말들이 다시 돌아오는 무서움을 알면서 말이다. 입을 막고 오늘은 귀를 열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거울과 마주한다.

여전히 세상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사람과 거리를 감시한다.

통제되고 마비된 격리 속에서 비로소 “나도 여기 있어요” 하고 말하는 이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멀어지고 잊어버리고 있던 것들 속에서도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을 찾고 죽음 같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의 말을 배우는 시간 아닌가! 소홀했던 예배, 무심했던 예배, 그래서 하나님께 죄스러웠던 예배를 회복하여

처음 자리로 가까이 가는 것 같아 떨리는 기쁨도 있다. 실상 예배란 하나님 앞에 멈춤이 아닌가!

우리의 신앙이 목사님 만나서 손해를 보았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우리의 인생이 목사님 만나서 손해 본 것은 없다” 라는 말이라도 들어야 할 텐데...

세월이 감추고 싶은 흉터가 아니라 자랑하고 싶은 예수의 흔적이 되기를 바라지만 역시 뒷모습은 남은 자의 몫이다.

“미국 이민 생활에서 우리 교회를 만나서 큰 축복이었다” 라는 말을 해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이 많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런 축복이 이 책을 만난 모든 분들에게도 있기를 기원한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중앙 동산 온 가족들의 한결같은 사랑과 오래 참음으로 곁에 있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당회원들의 격려와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도움을 주신 쿰란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모세내전》을 출판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

2020년 12월 텍사스 휴스턴에서

이재호 목사